요스트 호훌리 지음 | 김형진 옮김 | 워크룸프레스
2015년 출간 | 국판 변형(125X210) | 무선제본
2020년 1월 13일 작성
독자에게 활자와 그것을 둘러싼 요소들은 보이면서 보이지 않는 것이다. 활자는 글을 이루고, 글은 어떤 서사가 머릿속에 구현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창구에 가깝기 때문이다. 활자를 매개로 서사에 몰입하면, 아이러니하게도 독자는 활자를 보고 있음에도 활자가 보이지 않는 경험을 하게 된다. 요스트 호훌리는 그렇게 활자의 요소들이 잘 드러나지 않는 것을 지향점으로 생각하는 이들 중 하나이다. 한마디로 가독성(readability)이 타이포그래피 문제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것이다. 타이포그래피는 결국 활자를 다루는 기술이다. 그 중에서도 글자 하나가 다른 글자를 만나 글을 이루었을 때 생기는 요소들, 예를 들어 글자사이, 낱말, 낱말사이, 더 나아가 글줄, 글줄사이, 단에 이르는 영역들은 타이포그래피의 또 다른 고민거리이다. 요스트 호훌리는 이를 ‘마이크로 타이포그래피(microtypography)’라 호명했다. 이는 제목과 부제, 캡션 같은 요소의 위계를 다루는 매크로 타이포그래피(macrotypography)와 구별짓기 위해 만들어진 이름이다. 매크로 타이포그래피가 더 중심에 두는 것은 새로움, 창조성이다. 같은 위계라 하더라도 그것을 어떻게 구현할지는 천차만별이다. 그 속에서 창조적인 결과를 일궈내는 것이 매크로 타이포그래피의 목적일 것이다. 반면 마이크로 타이포그래피는 창조성의 문제를 부차적으로 여긴다. 그보다 이전에 발견한 익숙한 틀을 제대로 구현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달리 말해 형식성의 문제에 집중하는 것이다. 이는 결국 ‘어떻게 하면 더 잘 읽게 할 것인가’ 고민과 직결되어있다.
이 책은 마이크로 타이포그래피에 관한 교과서의 성격이 강하다. 글자부터 시작해 점차 큰 개별 단위(글자, 낱말, 글줄, 글줄사이, 단)에 따라 어떤 점에 유념해야 하는지를 설명한다. 예를 들어 글자, 활자체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독자들에게 친숙한 것이며, 보기 편한 비례감으로 활자체 디자인을 해야 한다는 사실이라든가, 낱말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글자사이 공간을 글자 속공간과 비례하여 설정해야 한다는 점, 가장 가독성이 좋은 글줄은 어느 정도의 글자가 있어야 하고, 너무 짧아도, 또 길어도 가독성이 떨어진다는 점과 같은 마이크로 타이포그래피 설계의 매뉴얼을 담고 있다. 이러한 매뉴얼의 궁극적인 지향은 독자에게 글의 내용이 투명하게(즉 최상의 가독성을 갖도록) 전달하는 것이다. 요스트 호훌리의 관점은 타이포그래피가 이렇게 혹은 저렇게 설계되었다는 사실을 독자가 전혀 생각지 못하게, 오롯이 텍스트에 집중하게 하는 것이 가장 성공적인 타이포그래피 설계라고 보는 듯싶다. 이에 반해 역자는 타이포그래피의 창조성 또한 무시 못할 부분이기에, 호훌리의 관점을 상대적으로 바라볼 것을 요청한다. 무엇이 정답이라 말하긴 어렵겠지만, 나는 본문에 있어 익숙한 형식성이 어느 수준까지는 유지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피로감이 적다 여겨지는 본문용 활자체를 더 선호할 수밖에 없고, 글줄이 너무 길거나 짧을 때의 읽기는 비효율을 초래하며, 글줄사이 혹은 행간이 어느 정도는 띄어져 있어야 텍스트가 주는 압박감이 덜하다는 합의 정도는 지켜야 하는 것이다. 분명 대량의 텍스트를 읽는다는 것은 짧은 문장이나 쪽글을 읽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일이다. 눈은 계속해서 활자체 뭉텅이를 읽어내야 하고, 그것 자체만으로도 노동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익숙함과 형식성을 강조하는 호훌리의 견해에 더 공감이 가는 듯싶다. 그럼에도 역자가 창조성을 강조한 것은 호훌리의 관점을 모조리 거부하라는 말은 분명 아닐 것이다. 차라리 원칙을 유지하는 와중에 미묘한 차이, 친숙한 일탈에 대한 강조에 가깝다. 그런 식의 창조성은 텍스트를 조판하는 문제에 있어 다른 가능성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것이야말로 디자인의 새로운 가능성일 것이다.
한국어 텍스트를 다루는 입장에서 라틴 타이포그래피에 대한 매뉴얼은 일단 간접적인 참고자료이다. 이 점은 항상 아쉬운 부분이다. 라틴 알파벳과 한글은 마이크로 타이포그래피의 대상이라는 점만 같을 뿐 구체적으로 들어가면 너무나 다르기 때문이다. 글자를 이루는 데 있어 모아쓰기를 하는 탓에 속공간은 더 복잡하고, 낱말과 글줄을 이뤘을 때 모습에는 알파벳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문제들이 도사리고 있다. 누군가 훌륭한 사람이 한글의 마이크로 타이포그래피에 대한 자신만의 매뉴얼을 내준다면 더할 나위 없이 감사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