얀 치홀트 지음 | 안진수 옮김 | 안그라픽스
2014년 출간 | 크라운판 변형(163X243) | 양장제본
2020년 7월 24일 작성
얀 치홀트(Jan Tschihold)는 이 책, 《타이포그래픽 디자인(Typographische Gestaltung)》을 1935년에 썼다. 1935년이라는 시기가 새삼 중요하게 다가왔던 까닭은, 타이포그래피에 대한 얀 치홀트의 입장 변화가 담긴 최초의 저서이기 때문이다. 그가 보다 젊었던 시절 내세웠던 것은 산 세리프가 중심이 되는 이른바 ‘새로운 타이포그래피’였다. 1920년대 독일의 진보적인 예술인들에게 바우하우스로 대표되는 현대성 내지 모더니티는 새로운 미감을 찾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기준이 되었다. 한마디로 전례 없는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것이 일종의 시대정신이었다. 얀 치홀트 역시 그 영향의 한복판에 있던 사람이다. 획이 없는 활자체, 산 세리프가 지향점이 된 것은 모더니티에 대한 감각과 궤를 같이 한다.
이런 지향점이 바뀐 계기는 1933년 나치당이 집권한 이래로, 다방면의 진보 인사들에게 가해진 폭력이었다. 얀 치홀트와 그의 가족들도 그 시기에 부당하게 고초를 겪어야 했는데, 그가 대학 교직에서 압력에 의해 해임된 때도 이 때였다. 기존의 인간다움의 정의(definition)로부터 가장 급진적인 전환을 꾀하는 모더니티의 기치는 다분히 여러 갈래로 향할 수 있었다. 예술적으로는 소비에트 구성주의와 추상 회화가 가능한 방향이었지만, 그건 문명의 속도를 지나치게 찬양하는 미래주의로 가닿을 수도 있었다. 정치적으로는 사회주의, 더 나아가 공산주의로 향할 수도 있었지만, 파시즘으로 귀착될 수도 있었다. 얀 치홀트는 모더니티의 양날의 칼 위에서 급진성을 다시 생각했던 듯싶다. 이 책은 여전히 새로운 타이포그래피로서 산 세리프 활자체의 훌륭함을 잊지 않지만, 과거의 세리프 활자체의 가치를 인정하는 면모를 보인다. 중요한 것은 새로움에 갇히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것이든 새로운 것이든 ‘좋음’을 제대로 아는 것이다. 얀 치홀트는 별 다른 좋음의 기준 없이 대충 만들어진 활자체가 우후죽순 등장하는 당시의 현실이 무척이나 싫었던 듯싶다.
그 좋음의 기준에 있어서 으뜸은 역시 적절히 아름답되 잘 읽히는 것이다. ‘필요한 정보가 정확하고 분명하게 잘 정리된 인쇄물’(34쪽)을 위해 복무하는 것이 타이포그래피의 목적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활자부터 낱말, 글줄에 이르기까지 조판에 있어서 보편적인 규칙 내지/기술이 필요하다. 이 때는 기계 조판이 점차 확장되는 시대였기에, 얀 치홀트가 그런 보편성을 더 중요하다고 봤던 듯싶다. 그런 보편적인 규칙은 이런 것들이다. 자간을 쓸데없이 넓혀서는 안 된다, 자간보다 어간, 어간보다 행간이 적어도 좁지 않거나 넓어야 한다, 들여짜기를 했다면 첫 단락과 마지막 단락까지의 일관성이 중요하다, 섞어짜기를 할 때는 크기, 굵기, 활자꼴을 고려하여 적절하게 대비를 줘야 한다, 요소들의 레이아웃은 요소 간 위계와 모양 전체를 동시에 볼 때 인상적인 결과를 얻을 수 있다, 적절히 쓰인 줄은 요소를 나누거나 묶을 때 효과적이다, 색은 제한적으로 사용될 때 가치가 높아진다 등. 수많은 타이포그래피 교과서가 나온 지금의 시점에서는 다소간 새삼스러운 지적들일 수 있지만, 80년도 더 이전의 시점에 쓰였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그 가치가 더 크게 느껴진다.
얀 치홀트는 책의 말미에 어떤 개체의 가장 순수한 요소, 즉 추상을 끄집어내는 구체예술과 타이포그래피에서 추구하는 요소 활용의 유사성을 지적한다. 굳이 이것을 덧붙인 것은 무슨 요소가 되었든, 그 요소들이 적재적소에 배치됨으로써 생기는 아름다움과 기능성이 타이포그래피의 목적임을 상기하고자 한 게 아니었을까.
당대 ‘잘 만들어진’ 라틴 타이포그래피의 사례들이 도판으로 수록되어서 읽는 내내 좋은 볼거리가 있었다. 정말 세련된 것은 시대를 초월하는구나, 새삼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한글은 알파벳과 형태에 있어서 많은 차이가 있지만, 역시 라틴 타이포그래피 저서들은 큰 틀에서 공통점을 찾을 수밖에 없다. 앞서 얘기한 보편적인 규칙들이 그런 것일 테고, 좀 더 크게 생각하자면 끊임없이 대조하고 연구해보면서 나온 ‘논리가 있는’ 작업 결과물이 더 생명력이 길다는 사실이다. 다소 여담이지만 여러 선생님들이 스케치를 강조했던 것처럼 얀 치홀트도 단순한 작업을 하는 게 아닌 이상 스케치를 하는 것과 안 하는 것의 차이는 크다고 지적했다. 시간에 쫓긴다는 이유로 작업하기에 앞서 하는 스케치를 대충하거나 포기했던 자신의 행태를 반성하게 된다. 수명이 짧은 작업물을 눈앞에 두고 후회를 하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대가들의 언명은 정말이지 허투루 들어서는 안 되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