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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 writing/서평 review

한글 디자이너 최정호

출판학교에 들어와 디자인 분야 도서에 관심이 생기면서 어렴풋이 알게 된 책이다. 최정호라는 인물이 머리에 각인된 시기와 이 책이 눈에 들어온 시기는 거의 차이가 나지 않는 듯싶다. 하지만 책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반드시 사고 싶은 생각이 드는 것은 아니다. 알고는 있으니 언젠가는 사겠지, 그런 생각을 했었다. 그러다 한 선생님의 마지막 수업 선물로 이 책을 받았다. 구입하고자 했던 책을 선물로 받으니 무척이나 기뻤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받은 책을 거의 1년이 지난 시점에야 완독할 수 있었다. 더 빨리 읽지 못한 게 아쉽지만, 얼마가 지났든 완독을 해냈고 글까지 썼으니 도리를 다한 것만 같다.

안상수・노은유 지음 | 안그라픽스

2014년 출간 | 크라운판 변형(180X245) | 양장제본

2020년 10월 30일 작성


글자를 쓰는 것과 활판 인쇄용 글자를 만지는 것의 차이는 무척 크다. 당연한 사실이겠지만, 이 차이를 직접 활자체를 다듬어보면서 알았다. 한 수업에서 전적으로 타의에 의해 그걸 해봤다. 기존의 잘 만든 디지털폰트를 펜툴로 거의 똑같이 따라 그려봤고, 그렇게 그려본 것을 바탕으로 내맘대로 활자체를 만들어도 봤다. 유사한 경험도, 활자체에 대한 지식도 거의 없는 상황에서 아주 고통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고통이 있던 만큼, 얻은 것도 적지 않았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냥 만들어졌을 것 같은 디지털 활자체에 쉬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고민이 담겨 있다는 사실과 그걸 얄팍하게 흉내내 나온 결과물에는 아주 많은 결점이 있다는 것이다. 그 결점은 깊이 따져볼 필요도 없었다. 그냥 훑으면 딱 보일만큼의 수준이었다. 내가 마감에 급급해 뱉어낸 글꼴은 어딘가 불안정해보이고 잘 읽히지도 않았다. 그 좌절감 만큼이나 기존 많은 사람들이 쓰는 활자체, 특히 이름 앞에 ‘SM’이 붙은 디지털폰트가 얼마나 위대한지도 느낄 수 있었다. 

사실 출판학교에 오기 전에 나는 SM 폰트가 뭔지 몰랐다. 최정호란 사람을 알기는 더 어려웠다. 좋은 글꼴에 대한 기준은커녕, 폰트 라이센스 문제에 저촉되지 않는 것이 활자체를 고를 때 최우선 고려 사항이었다. 미적·기능적 탁월함을 아는 것, 감식안을 갖는 것은 역시 경험이나 특정한 계기를 필요로 한다. 다들 ‘SM신신명조10’ 같은 류의 폰트를 쓰니까 그걸 그저 따라하기 바빴는데, 가독성이나 텍스트 본문의 전체적인 모양 면에서 안정감이 있다는 사실을 점차 깨달았던 듯싶다. 한 대상의 훌륭함을 알고 나니, 그 대상의 원형을 만든 사람 이름도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최정호는 재능이 많은 사람이었다. 나중에 한글 납활자나 원도를 만들게 될 줄 미리 알 수는 없었겠지만, 일단 글씨를 무척이나 잘썼고 그림도 꽤나 잘그렸다고 한다. 적어도 대상을 묘사하는 재능이 어렸을 적부터 탁월했다. 매체와 기술에 대한 관심도 무척이나 컸는데, 이 시대 미적 재능이 있고 기술을 좋아하는 사람이 대체로 향하는 도착지는 인쇄였다. 최정호가 청년기를 살았던 1930년대는 텍스트와 그래픽을 대량 복제해주는 인쇄 기술의 비약적인 성장이 있었다. 유례없는 기술 발전은 어느 시기에나 매혹적이다. 식민지 시기, 그가 일본으로 향했던 것도 더 발전된 기술 환경을 경험하기 위함이었다. 그렇게 인쇄 실무를 익히고 귀국했을 때, 아마도 본인은 인쇄 전문가의 길을 걸으리라 예상했을 것이다. 하지만 세상 일이란 게 꼭 한 방향으로만 흐르지는 않는다. 최정호가 자신의 첫 납 활자 원도, ‘동아출판사체’를 만들기 시작한 때는 그가 마흔이 넘었을 때였다. 적지 않은 나이에, 다른 사람의 부탁으로 시작한 일이었는데도 기존의 한글 납 활자보다 훨씬 뛰어난 조판을 가능케 했다. 잊혀진 재능이 집념과 만난 훌륭한 결과였다. 아무도 가르쳐 주는 사람 없는 환경에서 ‘맨땅에 헤딩’하듯 시작한 일이 현대 한글 활자체의 역사적인 사건이 되었다.

최정호가 만든 조판용 원도의 질적 도약은 1970년대 사진식자라는 새로운 기술 환경에서 이뤄졌다. 사진식자는 원도를 촬영하여 곧바로 인화지를 이용한 조판이 가능한 기술로 원도만 있으면 장체와 같은 변형 활자체 인쇄도 가능한, 당시로서 획기적인 기술이다. 조판 편의성 뿐만 아니라 사진식자 인쇄는 납 활자 인쇄보다 번짐이 덜하고 깔끔한 인쇄가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었다. 그만큼 조판의 근간이 되는 원도의 중요성은 더 커졌다. 일본은 일찍이 일본어 환경에 맞는 사진식자 원도를 제작해왔고, 모리사와(モリサワ)와 샤켄(寫硏) 같은 회사는 한국에도 진출해 있었다. 최정호는 일본 사진식자 회사로부터 원도 개발의 원리를 배워, 이전보다 훨씬 다양한 활자체를 개발할 수 있었다. 기존 명조, 고딕 계열의 획의 굵기를 다양하게 한 것(세명조, 중명조, 태명조/세고딕, 중고딕, 태고딕, 특태고딕) 뿐만 아니라, 한자명조나 굴림체 같이 획의 모양이 전혀 다른 글꼴들도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외국의 활자체에는 디자이너의 이름이 붙는 경우가 많다. 가라몬드(Garamond) 클로드 가라몽(Claude Garamond), 바스커빌(Baskerville) 바스커빌(John Baskerville), 코즈카 명조(Kozuka Mincho) 코즈카 마사히코(小塚昌彦) 이름을 땄다. 디자이너가 활자체에 자신의 이름을 붙일만큼 자부심이 있거나 훌륭하다고 여길 , 이름이 붙는 것이 아닌가 생각을 해본다. 실제로 이름을 붙인 활자체를 따라 디자이너의 족적을 찾아보면 하나같이 대가들이다. 한글 디자이너 최정호는 그런 대가의 칭호가 아깝지 않은 사람이다. 더구나 하나의 활자체를 매듭짓기 위해 수천자에서 많게는 만자가 넘는 글꼴을 다듬는 한글 디자이너의 노고는 문화권 활자체 디자이너의 노동량을 압도한다고 생각된다. 최정호는 단지 최초라는 이름만으로 기억되기에는 너무도 많은 일을 했다. 직접 부딪혀가며 한글 활자체를 다듬을 필요한 형태 원리를 만들었고, 탁월한 결과물로 질적으로 나은 한글 활자체가 무엇인지 보여줬다. 한편으로 한글 활자체 형태의 기본적인 범주(scale) 미리 제시했다고 생각된다. 그가 만든 원도의 활자체가 디지털 폰트로 넘어와서도 여전히 압도적으로 많이 사용되고 있는 것을 보면 스스로 꽃을 피울 터전을 만들고도 자신만의 꽃을 피운 것만 같다. 그가 죽기전 남긴 마지막 원도에 자신의 이름을 것은 스스로의 업적에 대한 걸맞은 자부심이 아니었나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