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학교에서 디자인을 공부하면서 책의 존재를 알았다. 그때 따로 사지 않고 빌려서 완독하려고 생각했는데, 여러 가지 일에 치여 정신이 없던 탓에 그럴 수 없었다. 그러다 미련이 남아서 꽤나 비싼 값에도 불구하고 구입했다. 책이 엄청나게 재밌을 거란 기대보다는, 그 설명 방식이 인상적이어서 배워보고 싶었다. 출판학교 한 선생님께 내가 디자인한 리커버 표지의 피드백을 의뢰했을 때, 그 분이 말씀하신 내용이 여전히 기억이 난다. ‘이렇게 제목 레이아웃이 되어 있으면 이 부분이 막혀 있어, 이렇게 흐르는 기운이 사라진다’는 식의 내용이었다. 레이아웃과 ‘기운’이란 표현은 무척이나 낯선 결합처럼 느껴졌지만, 디자인의 동북아적인 설명 방식이란 생각이 들었다. 스기우라 고헤이의 텍스트를 결국에는 완독한 것도 그런 신선함 때문이었던 듯싶다.
스기우라 고헤이 지음 | 송태욱 옮김 | 안그라픽스
2019년 출간 | 국판 변형(149X218) | 양장제본
2020년 8월 23일 작성
신이 모든 영역에 있어서 절대적이고 이상적인 어떤 상이라고 한다면, 인간은 딱 그와 반대되는 상을 이룰 것이다. 불멸하는 신에 대별되어 인간은 필멸한다. 스스로 모든 것의 기점이 되는 신과 달리 인간은 항상 무언가로부터 비롯된 존재다. 신은 무한한 데 비해 인간은 한없이 유한하다. 신이 창조한 것에는 결함이 없을 테지만, 인간이 만든 것들에는 대체로 어딘가의 모자름이 있다. 같은 의미로 인간이 하는 거의 모든 창작은 사실, 엄밀히 따지고 보면 무언가를 모방한 것이다. 레퍼런스가 없는 온전한 의미의 창작은 어쩌면 인간의 능력을 벗어난 일일 것이다. 인간이 문명을 건설한 이래, 온갖 종류의 창작은 있었고, 그 창작의 거의 모든 것은 자연의 신비로운 형태를 대상으로 삼아서 만들어졌다. 스기우라 고헤이(杉浦康平)는 이처럼 인간의 미감, 심지어 현대적 미감 속에도 무수한 레퍼런스가 있다는 사실을 전제한다.
『형태의 탄생』 제목 속 ‘형태(かたち)’, 즉 가타치는 한국어로 옮긴 ‘형태’보다 더 많은 뜻을 품고 있다. ‘가타(かた)’는 외형을 이루는 틀, 주형을 의미하는데, 거기에 덧붙여진 치(ち)는 그 형태가 마침내 이루어졌을 때 나타나는 기운, 영적인 힘을 뜻한다. 그러므로 어떤 상이 만들어졌을 때는 단지 그 외형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모인 요소들은 저마다의 독특한 기운을 만들어낸다. 스기우라 고헤이의 가타치는 전체가 부분의 합 이상으로 전체만의 무엇이 있다고 본다. 이는 비단 고대의 종교적 상징이 직관적으로 주는 ‘상서로움’ 뿐만 아니라 어떤 디자인의 레이아웃이 은은하게 주는 힘이나 느낌에도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의 부제(그림으로 보는 우주론)에는 ‘우주론’이란 말이 있다. 인간이 만든 온갖 종류 의 형태 속에 근본적으로 존재하는 원리를 탐구하겠다는 당찬 포부가 담겨 있는 부제인데, 그 핵심은 ‘연결’이다. 인간 신체의 형태부터 저 거대한 행성의 형태에 이르기까지 인간이 모방하는 대상, 즉 자연의 형태는 어딘가 연결이라도 되어 있는 것처럼 유사하다. 예를 들어 인간의 눈, 동공과 태양/달의 형태적 유사성은 신의 모습을 형상화하는 데 있어 영감의 대상이었고, 신체의 좌반신과 우반신의 대칭 유사하면서도 다른 ‘대칭’ 형태, 음과 양의 조화와 생동성 등 창작의 모티프가 되었다.
이런 세 가지 전제(인간이 만든 형태는 자연을 레퍼런스로 삼는다, 형태에는 저마다의 기운이 있다, 자연의 형태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를 바탕으로, 이 책은 우리가 익숙하게 알만한 보편적인 형태에 대해 다양한 사진을 곁들여 이야기한다. 그 보편적인 형태라고 하면 이런 것들이다. 인간의 동공, 태양과 달이 이루고 있는 구체, 왼손과 오른손의 단순한 신체 구조부터 상서로운 형태(예를 들어 학과 거북) 속의 대칭 개념, 대칭하는 쌍이 자연스럽게 합일을 이루는 형태(불교 탱화 속 만다라), 자연의 생성이 담긴 소용돌이 문양 등. 시대와 문명을 막론하여 도판 사례를 인용하는 저자의 논의는 다소 무모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과감하다. 그렇게 과감하게 치러진 일반화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인간이 자연을 모방하여 무언가를 만들 때 공통적으로 착안한 형태가 있다는 것이고, 그렇게 기본적으로 녹아 있는 형태를 바탕으로 다양한 변형들이 만들어졌다는 사실이다.
책이 후반부에 들어서면 이야기의 대상이 좀 더 구체적으로 바뀐다. 점으로부터 인간의 움직임을 담는 선, 그 선의 원리가 고스란히 담긴 문자로서 한자, 한자 중에서도 상서로움을 상징하는 ‘수(壽)’ 자에 대한 논의, 선이 면이 되는 방식으로서 책과 지도 이야기가 그랬다. 개중에서 저자의 본업이기도 한 북디자인 관련 장이 가장 흥미로웠다. 스기우라 고헤이의 형태 우주론은 책 제본을 이렇게 설명한다. ‘이차원의 종이가 접힐 때 ‘생명’을 얻어 존재감 있는 입체물로 변한다.’ 이것이 참으로 신선하게 다가왔다. 그렇게 여러 번 접힌 종이가 하나로 묶여서 책이 되고, 그 책에는 또 하나의 문자의 선이 있어 그것을 따라 이야기의 흐름이 이어진다. 이야기의 흐름은 또한 좌면과 우면의 공간적인 순환을 따라서 극적인 변화를 만들어낸다. 이렇게 보면 온갖 형태가 응축된 장이 책이라는 생각도 든다. 저자는 자신의 작업들을 북 디자인 사례 도판으로 가져왔다. 3차 원의 공간으로서 책의 요소 활용을 극대화하여 책등을 이용하여 디자인을 하거나(예를 들어 한 사람의 생애가 담긴 전집 책등에 그 사람의 연대기를 새겨 이어지게 하는 경우), 앞표지와 뒤표지가 서로 대비되게 그럼으로써 연결되게 한 디자인 사례를 볼 수 있었다. 지금 봐도 무척이나 세련되게 느껴져 놀라웠다. 물론 앞서 이야기한 발상들은 지금으로서는 다소 익숙하게 여겨지기도 하지만, 스기우라 고헤이가 이런 작업을 한 시기가 1970-80년대 임을 고려하면 그의 독특한 형태론이 선구적이고 오래가는 디자인 결과물을 가능하게 한 것이 아닐까 생각게 된다.
섬세하고 훌륭한 작업들에는 그 형태마다의 논리가 있는 듯싶다. 그 논리라는 것은 이런 형태가 무엇을 바탕으로 했는지, 그 의미의 기점은 무엇인지 설명하는 일이다. ‘왜 그 형태가 굳이 그렇게 되었나’라는 질문에 대답하는 것은 언제나 쉽지 않다. ‘그냥 그게 좋은 느낌을 줘서’라고 뭉뚱그려 이야기하는 것도 사실 완전히 틀리지는 않다. 우리가 일상 속에서 행하는 미감 찾기는 사실 논리보다 직관에 의존할 때가 많고, 그렇게 해서 얻어진 것이 아름다움과 완전히 동떨어져 있는가 하면 그렇지도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가 직관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사실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어떤 경험을 기반으로 한다는 사실은 중요하다. 스기우라 고헤이가 자신만의 형태 우주론을 감행한 것도 그런 경험의 계보가 어디까지 이어질 수 있을지 따져본 것이 아닐까. 그렇게 해낸 탐구로써 스스로의 디자인 논리를 구축한 것이다.
물론 저자의 디자인 논리를 그대로 따라서 흡수하는 것은 무척이나 힘든 일이다. 일단 그의 사상 기반으로 힌두/불교 문화와 일본 문화가 깊이 각인 되어 있어, 도판으로 갖가지 사례를 들어 줬음에도 와닿지 않는 부분이 많았다. 그럼에도 그를 따라 배우자면 나만의 디자인 근거를 찾는 작업이 중요한 듯싶다. 당장 구현된 형태는 왜 그렇게 되었는지, 그로써 특정한 ‘느낌’은 왜 생겼는지 질문하고 나름대로 답을 해보는 것이다. 그런 작업들이 계속되면 나만의 디자인 논리도 만들어지지 않을까, 막연하게 생각해 본다.
그럼에도 드는 생각은 이런 것이었다. 스기우라 고헤이는 분명 디자인의 대가이고 ‘아사아적인 디자인’을 말하는 유력한 인물이지만, 노동에 대한 전근대적인 인식은 이 사람도 역시 시대적인 한계가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 책 마지막에 있던 추천사는 그런 점을 꼭 치켜세우는 듯 적어놔서, 유감스러웠다. 예를 들어 금전적인 문제에 대해 확실하게 하지 않는 것이 무슨 미덕이라도 되는 것처럼 생각하는 대목이 그랬다. 계간지의 디자 인을 맡았는데 친분이나 소명을 이유로, 디자인료를 한 번도 받지 않았다고 했는데 나는 이게 이 사람이 가진 넓은 아량처럼 느껴지기보다, 이 사람 밑에 있는 수 많은 디자이너들에 대한 착취로 들렸다. 한편으로 ‘젊을 때는 잠을 줄이며 하고 싶은 일이 있는 데 말이야’라며 야근 등의 열정 노동이 직업인으로서 으레 해야할 일이라고 여기는 스기우라 고헤이의 태도는 착취를 정당화하는 논리처럼 여겨진다. 마치 전근대의 장인-도제의 노동 관계를 여전히 고수해야 할 것으로 생각하는 것만 같다. 이런 식의 착취는 한국에서도 적잖이 보이는 듯싶다. 자신의 명성 을 무기로 삼거나 경영난을 이유로 디자인 노동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지 않는 것은 사람을 교묘하게 소모시킬 뿐, 더 나은 디자인과 정반대로 향하는 길이다. 여전히 자본주의 사회인 한에서 장인 정신은 무엇으로 따져봐도 노동력에 대한 정당한 지불에서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