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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 writing/발제 혹은 정리 summary

[IC]새로운 자본 읽기(Kritik der politischen Ökonomie) — 1부 자본주의와 마르크스주의

 

 

미하엘 하인리히(Michael Heinrich) 지음 | 김강기명 옮김 | 꾸리에

2016년 출간 | 신국판 변형(143x230) | 양장제본

이문커먼즈 2021 6 13 세미나


1. 자본주의란 무엇인가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의 경제적 구조를 엄밀하게 살피고자 했다. 자본주의는 계급 사회의 한 형태다. 다만 특수한 계급 사회로서의 면모를 지닌다. 인간이 적어도 역사를 기술하기 시작한 이래로 계급은 존재했다. 자본주의 이전에는 주인이 노예에 대해 강제력을 발휘함으로써 직접적으로 착취하는 관계가 일반적이었지만, 자본주의는 적어도 형식적으로는 위계가 없어 보인다. 귀족사회에서 일반적인 ‘타고나는 특권’은 존재하지 않기때문이다. 그래서 자본주의 체제 하의 행위자들은 ‘자유롭게’ 노동력 등의 생산요소와 재화를 교환한다. 이 형식적 자유와 평등 속에서 착취 관계가 나타난다. 한편으로 자본주의의 착취는 소비나 욕구 충족이 가장 큰 목적이 아니라는 점에서 전자본주의 착취 관계와 차이가 있다. 자본주의 체제 이전에는 착취자가 더 큰 소비를 하고 본인의 욕구를 충족하기 위한 목적이 착취를 하는 원동력이었고 추가적인 자본 창출을 위한 행위들은 부수적이었지만, 자본주의 체제에 이르러서는 두 가지가 반대가 된다. 자본의 증식이 직접적인 목적이 되는 것이다. 자본을 더 키우지 않으면 파산하고 마는 멈추지 않는 확산의 운동 속에서, 자본가는 원하든 원치 않든 증식의 목적에 복무할 수밖에 없다. 이는 상업이 주를 이루는 맹아적 자본주의를 경유해 산업 영역으로 확장되면서(이른바 자본주의 생산 양식) 더욱 가속화되었다. 유럽의 자본주의가 확장되고, 그 모멘텀을 미국이 이어받는 20세기의 역사를 지나면 자본주의는 전세계적인 체제로 자리 잡는다. 최근에는 수익 창출이 용이하지 않은 변방을 제외하면 어떠한 지리적 경계도 지니지 않는 수준으로 지구화되었다.

 

2. 노동운동이 시작되다

자본주의가 산업 영역으로 확장되는 과정은 다르게 말하자면 노동자를 만드는 과정이었다. 봉건적 속박관계를 타파해 형식적 자유를 얻어야 비로소 노동력을 ‘자유롭게’ 팔 수 있게 되었다. 봉건적 속박관계를 타파하는 과정은 말로는 대단히 해방적으로 들리지만, 실제로는 땅에 메여 있는 사람들을 폭력적으로 뿌리 뽑는 과정이었다. 아울러 그렇게 내몰린 사람들이 막 노동자가 되었을 때의 노동 환경은 하루 15~16시간을 오롯이 일해야 했을 정도로 잔혹했다. 전례없는 착취는 분노를 낳고, 그 분노는 투쟁으로 이어졌다. 투쟁은 19세기를 경유하면서 조직된 노동 운동으로 발전했다. 국제적으로 커진(그럼에도 다분히 자본주의가 발전한 유럽중심적이었지만) 19세기 노동 운동의 핵심적인 이념은 점차 ‘마르크스주의’로 굳어지게 되었다. 변혁 운동에 있어서 마르크스 이론의 영향력이 커진 것은 맞겠지만, 이것이 마르크스의 실제 이론과 꼭 부합하는 것은 아니었다.

 

3. 마르크스와 마르크스주의

청년 시절 마르크스는 헤겔 철학의 영향을 받았다. 본래 법학도였으나, 철학과 정치가 청년 시절 그의 화두였다. 하지만 헤겔주의 급진파(이른바 청년 헤겔학파) 이론적 테두리는 그가 현실과 마주할수록 설명력이 떨어지는 무엇이었다. 포이어바흐(Ludwig Feuerbach) 헤겔 비판에 영향을 받으면서 마르크스는 자신만의 철학적 기반을 닦기 시작했다. 『경제학 철학 수고』는 청년기인 1844년의 결과물로서 자본주의적 관계 속에서 발생하는 인간 소외를 극복하기 위해 공산주의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비슷한 시기 평생의 동지인 엥겔스(Friedrich Engels) 만나기도 했다. 공명하는 많았던 사람은 『독일 이데올로기』를 통해 사변 철학을 비판하고, 철학으로부터의 전환을 시도했다. 한편 당대의 혁명적 흐름에 발맞춰 『공산당 선언』을 발간함으로써 혁명의 필연성을 역설했다. 하지만 흐름에 맞춰 만큼 직관적인 성격을 띄었고, 이론적인 밀도는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1848 혁명이 실패한 이후 마르크스는 현실 자본주의를 다루는 학문, 정치경제학에 본격적으로 몰두하게 된다.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 『자본』을 필두로 마르크스의정치경제학 비판프로젝트는 그가 죽을 때까지 이어지게 된다. 이러한 학문적인 작업과 함께 마르크스는 당대의 변혁 운동에 이론가로서 개입하고자 했는데, 사회민주주의 정당, 정치가들과 연대하거나(인터내셔널) 그들을 비판하는 작업(『반듀링론』) 그러했다. 마르크스의 영향을 방향이 어떠했든 강력했다. 카우츠키(Karl Kautsky) 19세기 마르크스가 세상에 내놓은 이론적 요소들을 다소간 도식적으로 규합하여 대중화하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이른바마르크스주의 맹아적인 형태다. 이러한 마르크스주의는 부르주아와의 계급적 대결에 있어서 대항 문화 혹은 대항 세계관을 찾고자 하는 노동자 정당, 노동 운동에 이념적 요소로 자리 잡게 된다. 이는 마르크스주의 세계관(Weltanschauung) 탄생이다. 그리고 이것이 정치적으로 가장 성공한 사례가마르크스레닌주의 일컬어지는 레닌의 마르크스주의 계승이었다. 동일성과 교조적인 틀을 강조하는 마르크주의 세계관에 대한 마르크스 본인의 생각은 부정적이다(“무언가 확실한 있다면, 그것은 자신이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 마르크스주의가 견고하게 받아들였던 것들은 정작 마르크스가 깨고자 했던 모순들과 닮아 있었다. 한편으로 마르크스주의 세계관의 교조적인 성격을 비판하는 일련의 흐름은 세계관의 형성만큼이나 꾸준하게 있었는데, ‘서구 마르크스주의 불리는 이론적 조류가 그것이다. 이들의 비판은 초기에는 마르크스 이론의 외부에서 변증법적 유물론, 역사적 유물론을 비판하는 것에 초점이 맞춰졌으나, 1960년대의 새로운 좌파 정치 운동과 맞물리면서 마르크스 이론을 보다 심원하게 연구하는 방향으로 향해갔다(알튀세르(Louis Althusser), 에티엔 발리바르(Étienne Balibar) 『자본』 연구가 대표적). 정치경제학비판 무엇인지 더욱 집중하게 것이다. 새로운 마르크스 독해를 추구하는 이론적 흐름은 지금까지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