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하엘 하인리히(Michael Heinrich) 지음 | 김강기명 옮김 | 꾸리에
2016년 출간 | 신국판 변형(143x230) | 양장제본
이문커먼즈 2021년 8월 15일 세미나
4. 자본주의적 생산력 발전의 파괴적 잠재력
자본주의적 생산과정에서 자본가는 노동이 효과적으로 조직되어 더 많은 잉여가치가 착취될 수 있도록 관리한다. 이는 과거에는 전제주의적 양상을 보였지만 20세기 이후로 접어들면서 노동자의 자율성을 강화하는 경향을 바뀌었다. 강압적인 관리보다 노동자들이 자발적으로 착취하도록 만드는 게 자본의 목적, 즉 끊임없는 이윤 창출을 수행하는 데 있어 더 낫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는 노동자 스스로가 자본의 파괴력을 조직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을 뿐이다. 생산력 발전이 파괴적 경향으로 나타나는 또 다른 방식은 노동시간을 늘리거나 ‘유연하게’ 만드는 방식으로도 나타난다. 생산력의 발전으로 기계가 도입되면 그 기계를 최대한 오래 돌리는 것으로 노동의 기준이 바뀌게 되고, 그에 따라 야간 노동을 하거나, 교대하는 식의 노동이 발생하는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노동조건이 악화되는 경우, 이윤이 최우선인 자본가는 자발적으로 노동조건 개선에 동참하지 않는다. 노동자들의 투쟁이나 법적인 강제력이 발휘되어야만 진전을 볼 수 있다. 비단 인간의 노동 뿐만 아니라 자연 역시 생산력 발전의 파괴적 경향이 악영향을 미치는 부분이다. 생태계 파괴와 화석 연료 사용의 증대로 인한 기후 변화는 늘상 목도하는 문제가 되었다. 한편으로 생산력 증대의 순기능을 말하는 것이나 산업적 생산 자체는 긍정적이라고 여기는 주장은 어떻게 봐야할까? 이는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입장이기도 한데, 실상은 그게 자본주의적인 사용방식이든 아니든, 기술적-산업적 발전경로를 택한 이상 다르지 않은 파괴력을 보여주고 있다. 자본의 파괴적 잠재력은 그게 이용되는 방식과 상관 없이, 산업적으로 커져가기 시작할 때부터 내재하고 있는 문제라고 보는 게 더 옳을 것이다.
5. 형식적 포섭과 실질적 포섭, 포드주의, 생산적 노동과 비생산적 노동
형식적 포섭은 기성의 노동과정이 자본의 종속되는 경우를 말한다. 노동과정이 생산력 증대를 목적으로 변형되는 경우를 실질적 포섭이라 한다. 전자의 상황에서 자본가는 절대적 잉여가치만 취할 수 있는 반면, 후자로 접어들면 상대적 잉여가치를 손에 쥘 수 있다. 절대적 잉여가치는 노동시간의 절대량을 늘림으로써 생산된다. 상대적 잉여가치는 생산력의 발전으로 필요한 노동시간 자체가 줄어들어, 노동력의 가치가 떨어짐으로써 만들어질 수 있다. 하지만 이렇게 잉여가치를 늘리는 게 반드시 노동자의 생활수준을 낮추는 것을 전제하진 않는다. 임금이 떨어졌어도, 사회 전체의 생산력 증대로 인해 물가가 그보다 더 크게 낮아졌다면 오히려 노동자의 생활수준은 나아질 수 있다. 예를 들어 테일러주의와 포드주의는 노동과정의 분할과 표준화로 생산 비용을 낮췄고, 동시에 노동력의 가치도 내려갔지만 생활을 뒷받침 해줄 공산품/소비재의 생산량을 크게 늘려 물가 수준을 더 크게 낮췄다. 그럼으로써 노동자들의 실질 임금은 상승했다.
한편으로 자본주의 체제 아래서 생산적 노동과 비생산적 노동을 가르는 기준은 잉여가치를 생산하는지 여부다. 같은 음식을 만들어도, 집에서 나눠 먹기 위해 만든 것은 비생산적인 반면 레스토랑에서 상품으로 내놓기 위해 만든 것은 생산적인 노동이 된다. 후자는 판매됨으로써 잉여가치를 생산하기 때문이다. 결국 생산적 노동은 임금 노동과 맞닿아 있는데, 모든 임금 노동이 생산적 노동인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똑같이 고용된 요리사더라도 레스트랑 요리사와 누군가의 개인 요리사는 다르다. 레스토랑 요리사에게 자본가가 지출하는 돈은 잉여가치로 다시 돌아올 것을 전제하기 때문에 ‘투하’되는 것인 반면, 개인 요리사에게 지출하는 돈은 돌려받을 것을 생각지 않는다는 점에서 ‘소비’다.
6. 축적, 산업예비군, 빈곤화
자본의 증식과정은 투하한 돈에 잉여가치의 양만큼 증가한 돈을 다시 투하하는 과정이다. 이렇게 잉여가치가 자본으로 전화되는 것이 축적이다. 이는 끝이 없기 때문에, 자본가는 축적을 향한 굴레에 놓이게 된다. 앞선 장에서 투입되는 자본을 불변자본(기계, 원료 등, c)과 가변자본(임금, v)으로 나눈 것을 봤다. 여기서 불변자본을 가변자본으로 나눈(c/v) 비율을 ‘가치구성(Wertzusammensetzung)’이라 이른다. 또한 생산수단의 양과 그것을 사용하는 데 필요한 노동력 사이의 비율을 자본의 ‘기술적 구성(Technische Zusammensetzung)’이라 이른다. 기술적 구성이 가치 구성을 결정하고, 기술적 구성의 변화를 가치 구성이 반영하는 경우를 ‘자본의 유기적 구성(Organische Zusammensetzung des Kapitals)’이라 한다. 따라서 유기적 구성은 기술적 변화가 미친 영향만을 다룬다.
가치구성, 노동력의 가치, 노동일이 동일하다고 했을 때, 자본의 커질수록 노동력의 수요는 늘어난다. 그에 따라 노동력의 가격이 노동력의 가치보다 상승해서 잉여가치가 감소하는 결과가 나타난다. 수요를 줄어들게 하기 위해 기계가 도입된다. 이는 자본가가 생산비용 증가를 감수하더라도 가변자본 비용을 더 큰 폭으로 줄일 수 있다 판단했을 때 이뤄진다. 노동력의 수요가 자본의 증식 조건에 맞춰 조절되기 때문에 노동력을 팔려고 해도 구매자를 찾지 못한 산업예비군이 발생한다. 즉 자본이 축적되면서 노동력 수요가 늘어나는 효과(축적의 고용효과)가 한편에 있고, 가치구성의 증가로 노동생산성이 높아지면서 필요한 노동력의 수준이 낮아지는 효과(생산력 증대의 해고효과)가 또 한편에 있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자본이 점점 더 많은 산업예비군을 낳는 경향이 있다고 봤는데, 이는 자본의 잉여가치가 늘어나는 ‘집적’을 거치는 것 뿐만 아니라, 여러 자본이 하나로 합병되는 ‘집중’의 과정도 밟게 되어(집중되는 와중에 수반되는 기술혁신의 가속화) 생산력 증대의 해고효과는 계속 유지되는 반면, 축적에 의한 고용효과는 발생하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산업예비군이 늘어나는 경향은 입증하기 쉽지 않다. 하지만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 산업예비군은 사라질 수 없다. 자본가 입장에서 산업예비군의 존재는 고용된 노동력의 임금 하락을 압박하기 좋고, 자본축적 시에 노동력 수요 충족을 더 쉽게 해주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완전고용’은 애초에 자본의 목적이 아니다. 아울러 실업자를 양산한다는 이유로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것 역시 애초에 실업자를 안만드는 게 자본의 목적이 아니었다는 점에서 핀트가 어긋난 비판이다. 자본주의에 대한 마르크스의 비판은 실업의 해소, 노동자 생활 수준의 향상, 분배의 형평성으로 축소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가 자본의 증식 과정을 밟는 내내 인간과 자연을 도구화했고, 자본 증식을 뒷받침하는 생산력 발전에 내재한 파괴력은 새로운 형태로 비참한 삶의 조건들을 만들어내고 있다고 본다. 그러한 삶의 조건은 생활수준의 부분적인 향상과는 별개의 문제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를 고스란히 분석하고 증명하는 방식으로 자본주의 폐지를 역설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