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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마르크스의 생태사회주의(Karl Marx’s Ecosocialism) — 2장 정치경제학에서의 물질대사

 

사이토 고헤이(齋藤幸平) 지음 | 추선영 옮김 | 두번째테제

2020년 출간 | 국판(148x210) | 무선제본

이문커먼즈 2021 3 21 세미나


 

0. 도입글

물질대사(Stoffwechsel)는 ‘생태학 ’이 자연의 경제를 체계화하기 전 19세기 유행한 생리학 개념이다. 이는 유기물에서 비유기물로 전환되는 과정, 즉 생산, 소비, 소화 과정 전반을 다룬다. 물질대사는 자연과학을 넘어서 철학과 정치경제학에서 쓰이기 시작했는데, 마르크스(Karl Marx)도 이를 이론적 근간으로 참고했다. 마르크스는 물질대사의 순환에서 인간이 자유롭지 않다고 봤기 때문에 물질대사 개념을 참고대상으로 삼았지만, 인간은 자연을 비교적 자유롭게 변형할 수 있는 ‘노동’을 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고 봤다. 노동 과정은 인간과 자연의 특수하고도 끊임없는 물질대사 과정인 것이다. 이를 전제로 볼 때 자본주의는 생산의 팽창이란 측면에서 기존의 물질대사 과정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달라진 체제이며, 그러한 급격한 변화는 물질대사 상호작용의 왜곡을 필연적으로 거쳤다. 저자는 앞선 장에서 마르크스의 이론을 생산력주의 혹은 과학주의로 환원하는 이론적 경향을 비판하고, ‘소외’ 개념을 본질을 상정하는 철학의 원천으로 삼는 것의 문제를 지적했다. 이 장에서도 몇몇 이론가들이 비판을 하기 위해 마르크스의 이론을 부당하게 전제하는 문제를 끊임없이 지적한다. 아울러 ‘물질대사’ 개념을 둘러싸고 누구의 이론을 받아들이고 배격했는지를 분명하게 가린다.

 

1. 모든 부의 소재인 자연

마르크스의 노동을 절대화해서 자연에 대해서는 무관심했다는 비판은 일반적으로 들리는 주장이다. 하지만 마르크스는 애초에 그런 주장을 한 적이 없다. 오히려 자연과 인간의 상호작용을 전제로 삼았으며, 자연을 비유기적 신체로서 바라보는 관점에 더 동의했다. 그렇기에 노동 역시 인간과 자연의 통합을 향한 매개물이다. 청년 마르크스가 자연으로부터 인간의 소외를 말했던 건 둘의 통합이 붕괴되고 변형되는 문제의식과 무관하지 않다. 그 문제의식의 핵심에 자본주의가 있다고 보게 되면서 마르크스는 철학이 아닌 정치경제학에 중점을 두기 시작한다. 철학과의 결별은 ‘인간주의=자연주의’의 도식이 더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생각과 더 철저하고도 구체적인 분석의 틀로 관념론이 아닌 유물론의 필요성 때문이었다. 물질대사와 같은 자연과학 개념의 수용도 이러한 경향과 관련있다.

저자는 『자본』의 집필이 자연과학적 요소가 접목된 정치경제학 연구라는 거대한 프로젝트였고, 그만큼 방대했기 때문에 마무리되지 못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노트 등의 집필흔적을 추적하면 그 프로젝트가 어떤 상이었는지 가늠할 수 있다고 본다. 물질대사를 추적하는 것도 그 연장선 상에 있다.

 

2. 물질대사 개념의 계보학

물질대사 개념은 유스투스 폰 리비히(Justus von Liebig)가 처음으로 개념화 했다. 그는 기본적으로 화학자였고 식물과 동물의 유기적 과정을 분석하면서 물질대사 용어를 착안했다. 이는 한마디로 유기체 내 다양한 화합물이 변환되고 배출되는 끊임없는 상호작용 과정이라 할 수 있다 (112) . 이는 비단 하나의 유기체 내 유기물 순환을 설명하는 것을 넘어서 식물-동물-인간 사이의 상호작용을 분석하는 넓은 틀로 쓰이기 시작했다. 물질대사 개념은 철학과 정치경제학으로 넘어와 인간과 사회를 설명하는 틀로써 쓰이기도 했는데, 마르크스도 이를 눈여겨봤다. 『런던 노트』 중 하나인 「성찰」에서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비교적 자유로워진 인간들 간 경제 관계를 물질대사 상호작용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자본주의 경제 관계에서 물질대사의 순환을 가로막는 요소로 계급을 든다는 점이다. 비슷한 시기 마르크스에게는 물질대사 개념을 좀 더 적극적으로 내세우려 한 동료가 있었다. 롤란트 다니엘스(Roland Daniels)가 그랬다. 롤란트 다니엘스는 자신의 저작 『소우주』에서 ‘유기적 물질대사’ 개념을 “신체가 각자의 개성을 끊임없이 그리고 새롭게 생산함으로써 각자의 개성을 유지하는 과정에서 파괴와 재생이 동시에 일어나는 현상”(119)이라 개념화하면서 자신만의 유물론을 펼쳤다. 아울러 정신적 물질대사를 따로 두되 그것을 유물론적으로 이해함으로써 신체/정신의 견고한 이분법을 허물고자 했고, 절대정신을 말하는 식의 사변철학과도 대결했다. 하지만 마르크스는 여기에 역사나 구체적인 맥락이 없고, 기계론적이고 결정론적이라는 점을 비판했다. 그럼에도 다니엘스의 아이디어는 마르크스가 물질대사 개념을 국민경제에 적용하는 데 영향을 주었다. 『그룬트리세』에 물질대사 개념이 더 체계적으로 쓰인 사실에서 알 수 있다. 마르크스는 여기서 노동 과정을 인간과 자연 사이에서 이뤄지는 물질대사 상호작용이자 원료와 생산수단, 인간 노동이라는 세 가지 생산 조건이 자연 안에서 물질적으로 상호작용하는 과정이라고 말한다. 이는 『자본』에서 소재의 변화(Stoffwechsel, 물질대사)와 형태의 변화(Formwechesel)를 구분해 사용가치의 변화(예를 들어 물질의 실질적인 쓸모 변화, 물질이 소모되는 과정 등)와 가치의 변화(예를 들어 화폐와 상품 사이에서 이뤄지는 교환)의 차이를 설명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비슷한 시기 정치경제학에 물질대사 개념을 차용한 또 다른 경우로 빌헬름 로셔(Wilhelm Roscher)가 있는데, 이는 마르크스에 비해 조악했다. 빌헬름 로셔도 물질대사와 관련하여 소재와 형태의 구분은 그대로 따랐다. 하지만 로셔는 둘의 구별을 분명하게 추상하지 못한 채 물적 모습의 변화와 그렇지 않은 변화로 나누는 데 그쳤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물질대사 개념이 정치경제학계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는 사실일테다. 이는 화학자이자 개념 창안자인 유스투스 폰 리비히도 국민 경제에 신체의 물질대사를 빗대는 비유를 했다는 사실로도 알 수 있다. 마르크스가 『그룬트리세』에서 물질대사를 개념화한 또 다른 측면은 ‘자연적 물질대사’다. 이는 어떤 물질이 부패하고 소멸해가는 과정을 이른다. 노동은 자연 소재에 외적 형태를 부여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그 소재는 소멸해간다. 예를 들어 인간은 나무라는 소재에서 책상이라는 외적 형태를 부여하지만 그 책상은 서서히 망가지는 과정을 밟는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자연의 내적 법칙, 즉 자연력이 노동이 인위적으로 창조한 외부 형태와 긴장 관계를 이룬다는 사실이다.

 

3. 인간학적 유물론의 한계

인간학적 유물론의 틀로 마르크스를 바라보는 이들은 마르크스 이론 내에 자연과학 유물론의 영향을 확대 해석한다. 알프레드 슈미트(Alfred Schmidt)도 그런 경우다. 알프레드 슈미트는 자신의 저서 『마르크스의 자연 개념』에서 야코프 몰레스호트(Jacob Moleschott)의 영향을 과대평가하고, 유스투스 폰 리비히의 이론적 요소를 의식적으로 간과한다. 몰레스호트는 리비히보다 훨씬 자연과학적인 인물로, 1850년대 유물론 논쟁을 주도한 이들 중 한 명이다. 그는 인산과 같은 화학적 요소가 식물을 넘어서 인간의 행태에 주요한 영향을 끼친다고 봤다. 비유기물이 유기물과 결합되고 순환하는 물질대사 과정을 다소 일반론적으로 환원했다. 그것을 ‘영혼의 재생’ 과정이라 일컬었다. 이는 환원론적일 뿐 아니라 지극히 구체적인 맥락을 막론한다고 봤기 때문에 초역사적이었다. 이런 점에서 몰레스호트는 포이어바흐(Ludwig Feuerbach)의 사상에 이끌렸다. 둘다 이원론을 배격함과동시에 유물론적이었고 하나의 본질을 찾으려 했기 때문이다. 포이어바흐 역시 양분을 신체/정신적 활동의 기초로 상정한 몰레스호트의 이론을 새로운 범신론으로 높이 평가했다.

마르크스는 포이어바흐를 비판하는 만큼 몰레스호트를 멀리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도 알프레드 슈미트는 마르크스가 몰레스호트의 영향을 짙게 받았다고 부당하게 전제하면서 자신의 주장을 전개한다. 스승인 아도르노(Thedore W. Adorno)의 사상을 기반으로 슈미트는 자연을 ‘부정존재론’이라는 이름으로 마르크스의 사상에서 구제(?)하려고 한다. 즉 자연은 ‘자연과 사회를 아우르는 총체적인 상태로 존재하고 사회 안에 침투해 있다’는 것이다(138) . 아울러 이 총체적인 자연은 변형할 수 없는 소재적 측면으로 말미암아 이차자연으로 온전히 환원되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 소재적 측면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설명하지는 못한다. 슈미트는 마르크스가 자연법칙을 폐지/초월할 것이라는 스승인 아도르노의 생각을 전제로 그게 아니었음을 밝히고자 했으나, 저자는 애초에 아도르노가 상정한 주장이 틀렸고, 마르크스의 기획과는 상관이 없다고 본다. 따라서 슈미트의 구상도 그에 못지않게 빗나가고 있는 것이다. 슈미트의 인간학적 유물론에 대한 감화는 포이어바흐를 높이 평가하는 경향과 결부된다. 그리고 그의 결론이 인간과 통합된 자연을 새롭게 인식하는 식의 의식 변화라는 사실도 포이어바흐와 닮은 점이다.

 

4. “자연과학 유물론”을 넘어서

한편으로 마르크스의 물질대사 개념에서 자연과학 유물론의 영향을 지나치게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것도 문제다. 에이미 E . 웬들링(Amy E . Wendling)은 루드비히 뷔흐너(Ludwig Büchner)의 저작과 마르크스 이론의 관계를 보고자 했다. 신체 기관의 물질대사 과정에 내재한 편차가 고정자본과 유동자본의 개념 형성에 끼친 영향이 그것이다. 이는 크게 두 가지 방향으로 문제가 있다. 하나는 번역의 문제다. 웬들링은 영역판으로 뷔흐너의 텍스트를 보고 마르크스의 개념과 비교했는데, 정작 원전에는 다른 내용이 있다. 다른 하나는 유스투스 폰 리비히에 대한 그릇된 비판을 전제로 한다는 점이다. 웬들링은 뷔흐너나 몰레스호트가 그런 것처럼 리비히의 이론을 그릇된 생기론이라고 본다. 아울러 마르크스가 리비히의 이론적 유산과 멀어졌기 열역학 패러다임으로 전환할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 이런 주장은 마르크스 이론 내 생태학적 측면을 설명하지 못한다는 점에서도 문제적이다. 오히려 실재에 가까운 것은 마르크스가 물질대사 이론에 있어서 리비히의 이론을 근간으로 삼아 자신만의 생태학적 이론을 발전시켰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다양한 기관의 다양한 재생산 기간에 관심을 기울인 것은 리비히가 미처 다루지 못한 것이다. 마르크스에게 리비히 외의 몰레스호트나 뷔흐너 같은 이들은 구체적인 것을 간과하는 환원론자들일 따름이었다.

 

5. 『그룬트리세』에서 생리학의 역할

앞서 마르크스의 물질대사 개념 사용을 잘못 이해한 경우를 살펴봤는데, 그렇다면 마르크스가 생리학을 차용한 진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정치경제학의 ‘소재적 측면’을 이해하기 위해서였다. 물론 ‘상품’이나 ‘화폐’ , ‘가치’ 같은 개념의 사회적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사용가치가 중심이 되는 소재적 측면을 가져올 필요는 없다. 문제는 현실을 좀더 깊이 바라봤을 때 소재적 측면을 떼어 놓을 수 있는지 여부였다. 자본에 의한 경제적 형태 규정은 세계의 소재적 측면을 적극적으로 변형하면서, 또 한계의 직면하는 과정을 포함한다(152) . 모든 생산의 요소들은 필연적으로 소모되고 부패한다. 이는 경제 외부에 있지만 필연적으로 작용한다. 신체에서 혈액과 근육, 뼈의 소모 정도가 다른 것처럼, 마르크스는 『그룬트리세』에서 자본을 고정자본과 유동자본으로 나눈다. 이는 생산수단과 원료라는 형태적인 측면에서 일차적으로 나눠질 수도 있지만, 내구도와 같은 사용가치의 소재적 본질로도 나뉠 수 있다. 이에 따르면 내구도가 상대적으로 높은 노동 수단은 고정자본, 내구도가 상대적으로 낮은 원료나 생산물은 유동자본이라 할 수 있다. 후자는 전자에 비해 빠른 순환이 요구된다. 아울러 생산력이 발전할수록 한번에 요구되는 양은 커진다. 결국 자본이 확장될수록 자연 조건에 더 많이 의존하게 되는 셈이다. 자본은 축적을 향한 열망을 놓지 않고, 생산은 자연 조건에 더 많이 의존하게 됨에도 자연 조건을 오롯이 통제하는 것은 불가능한 상황이 초래될 수 있는 것이다(자연조건이 생산 과정에 비우호적인 요인으로 작용, 156) . 마르크스는 불황과 같은 경제 위기가 발생할 수 있다고 본다. 이는 다르게 말하자면 고정자본과 유동자본의 적절한 소재적 배분에 실패한 것이며, 사회적 물질대사와 자연적 물질대사 사이의 교란이 발생한 것이다(156) . 그런데도 자본은 생각보다 탄력적이어서 한계를 극복하는 자체 동력을 부분적으로 갖고 있다. 저렴한 원료, 신소재를 발굴하고, 신기술을 개발하는 등의 행위는 자본이 스스로 불러온 한계를 타개하는 방식이다. 하지만 소재는 무한하게 탄력적이지 않고, 소재적 한계를 극복하는 자본의 방식은 모순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이런 모순은 ‘살아있는 모순’으로서 역사적으로 그 형태를 달리한다. 아마존 산림 파괴, 중국발 대기오염, 후쿠시마 원전 사고는 지금 이 시대의 모순이다. 자본주의는 결국 지속가능성의 측면에서 대단히 비합리적인 체제인 것이다.

마르크스의 본연의 분석을 따라가다보면 굳이 부정 존재론과 같은 관념을 상정하지 않더라도 유물론적인 자본주의 비판이 가능하다. 마르크스는 물질대사 개념과 연동하여 쓰는 소재 개념을 더욱 구체적인 분석으로 밀고 나간다. 인간과 자연의 물질대사 과정으로서 노동 과정은 자본의 포섭 속에서 어떻게 변형되는지, 질문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