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토 고헤이(齋藤幸平) 지음 | 추선영 옮김 | 두번째테제
2020년 출간 | 국판(148x210) | 무선제본
이문커먼즈 2021년 5월 2일 세미나
0. 도입글
마르크스(Karl Marx)가 생산력주의, 혹은 프로메테우스주의를 내세우며 생산력의 무한한 확장을 온전히 긍정했다는 일부의 주장은 앞선 장에서도 옳지 않음을 여러 차례 확인했다. 그 주장들은 주로 마르크스와 엥겔스(Friedrich Engels)의 초기, 중기 저작에서 쓰인 내용을 바탕으로 한다. 저자 사이토 고헤이는 마르크스가 자신의 이론을 발전시키면서 그런 생산력주의의 이론적 요소들과 결별했으며, 점차 생태적 관점에서 자본주의 비판을 지향했음을 책을 통틀어 계속해서 드러내려 한다. 4장에서는 유스투스 폰 리비히(Justus von Liebig)의 이론이 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 비판에 어떻게 맞물려서 주요한 영향을 자리잡았는지를 구체적으로 논구한다.
1. 1865년 이전 마르크스의 지대 이론
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 이론은 데이비드 리카도(David Ricardo)를 필두로 한 부르주아 정치경제학과의 대결에서 피어났다. 아울러 지대 이론 역시 그들의 이론적 영향 속에서 모순점을 발견함으로써 성장했다. 리카도는 이른바 “수확 체감의 법칙”을 중심으로 자신의 지대 이론을 폈는데, 수확 체감의 법칙은 인구가 증가해 식량 수요가 늘어남에도 토지의 비옥도는 차등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노동량 대비 수확량은 줄어들 수밖에 없다는 설명이다. 토지의 경작은 비옥도가 가장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확장될 것이고, 늘어난 수요를 충당하기 위해 더 확장하여 개간한 곳이 낮은 비옥도를 지니는 탓에 노동량 대비 수확량은 필연적으로 떨어지는 것이다. 차액지대가 발생하는 까닭은 비옥도에 따라 투입된 자본 대비 생산량의 차이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마르크스는 이런 주장이 지금 당장의 현실만 바라본다는 점에서 몰역사적으로 여겼고, 문명 발전 과정은 농업 발전 혹은 토양 생산성을 증대시키는 과정이라는 사실로써 그와 같은 부르주아 지대 이론을 비판했다. 따라서 토양 비옥도를 상승시킬 수 있는 수준 만큼 지대는 줄어들 것이고, 사유재산과 같은 사회 발전의 저해 요소가 폐지된다면 기술 적용의 사회적 통제가 더 용이해져 지대가 흔적만 남게 될 것이라고도 생각했다. 한편으로 리카도 식의 수확 체감의 법칙을 긍정한다면 사회주의 사회가 된다고 한들 인구 과잉으로 인해 멸절에 이를 것이라는 멜서스(Thomas Malthus) 식 비관주의에서 벗어나기 어려워진다. 그렇기 때문에 마르크스는 자본 투입 대비 농업 생산성 증가를 더욱 가정했고, 차액지대가 노동 생산성 감소 현상에서만이 아닌 증가 현상에서도 나타남을 증명하고자 했다. 아울러 산업에 비해 농업이 가변자본의 비중이 더 높다는 점을 파고들어 비옥도 차이와는 별개로 가치와 생산 가격 차이에서 발생하는 ‘절대지대’를 이론화했다.
이렇듯 마르크스는 1865년 유스투스 폰 리비히의 저작을 접하기 전에는 농업의 생산성이 수확 체감의 법칙이 가정하는 것에 비해 탄력적으로 발전한다고 봤다. 또한 사회주의 전환과 맞물려 농업의 형태가 보다 집약적으로 바뀌고 발전된 기술의 투입이 더 능동적으로 된다면 농업 역시 산업과 같은 유기적 구성 수준(불변자본 대 가변자본 비율)에 이르러 절대지대 역시 사라질 것으로 생각했다. 이 시기는 이후에 비해 생산력주의의 흔적이 깊게 남아 있던 것으로 요약할 수 있는데, 유스투스 폰 리비히의 이론은 수확 체감의 법칙에 대한 다른 방향(보다 자연의 한계를 경험적으로 인지하는 방향)의 비판을 가능케 하는 계기였다.
2. 자연의 한계에 대한 유스투스 폰 리비히의 인식
마르크스는 수확 체감의 법칙과 대결하기 위해 탄력적인 생산력을 긍정했지만, 그게 꼭 그렇지 않음을 인지하고 있었다. 유스투스 폰 리비히의 농화학 이론은 그 간극을 메워주는 요소였다. 즉 자본 투자가 연이어 이뤄짐에도 토양 생산성이 하락하는 문제를 설명하는 틀을 주었다.
리비히는 토양을 유기적 구성요소와 비유기적 구성 요소로 나눠 제반 구성 요소가 동시에 충족되었을 때 식물이 제대로 자랄 여건이 마련됨을 알아냈다(보충의 법칙). 이는 다른 요건 없이 특정한 유기물만이 있을 때 작물 생산량을 극대화할 수 없다고, 모든 양분이 최소한도 이상 토양에 함유되어야 한다는 설명이다(최소량의 법칙) . 이에 따르자면 농업이 집약화되어 투입될 수 있는 노동량이 두 배 늘어나더라도 그에 비례해 제공될 수 있는 제반의 물질/양분이 두 배로 늘어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생산량이 증가하지 못한다는 비판이 가능해진다. 리비히는 정치경제학을 잘 알지 못했고,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이 추상적으로 전제했던 수확 체감의 법칙을 그대로 인용하는 문제가 있었음에도 마르크스가 보기에 둘의 차이는 경험적인 엄밀함 측면에서 크게 달랐다. 리비히의 이론은 부르주아 정치경제학이 추상적인 수준으로 전제하는 데 그쳤던 수확 체감의 법칙에 화학적/생리학적 증거를 제시해줬다. 이는 마르크스가 자신의 정치경제학 이론에서 토양의 소재적 측면을 인식하고, 생산력주의나 기술 낙관론의 흔적을 비판하도록 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이는 자연의 한계를 극복하는 게 아닌 인간과 자연의 물질대사 상호작용을 지속 가능하도록 해야 하는 생각, 그러한 물질대사 상호작용을 민주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힘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3. 유스투스 폰 리비히의 이론을 수용한 빌헬름 로셔
마르크스가 리비히의 이론을 받아들이기 전부터 정치경제학자 빌헬름 로셔(Wilhelm Roscher)는 먼저 그 이론적 가치를 알아차린 인물이다. 하지만 마르크스는 로셔의 이론을 크게 눈여겨 보지 않았고, 인용하더라도 주로 비판적인 입장이었다. 물론 로셔가 조방농업에서 집약적 농업으로의 전환을 크게 봤다는 점은 마르크스도 동의하는 부분이다. 문제는 그 집약화 과정에서 발생하는 모순을 로셔는 자연스러운 것 이상으로 바라보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리비히 조차도 집약화가 계속되면서 토양의 구성 요소를 집약적으로 흡수해 생산력을 극대화하는 ‘강탈 농업’의 문제를 지적하고 있는데도 빌헬름 로셔는 강탈 농업이 경제적으로는 정당화될 수 있다고 본다. 그리고 그것을 통제하는 문제에 시장의 원리를 가져와 더이상 고민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강탈 농업으로 생산량이 줄어 들면 생산량의 시장가격이 올라갈 것이고, 그것을 타개하기 위해 자본 투자를 기반으로 한 기술 혁신이 이뤄져 다시 생산 비용이 줄어들 것이란 낙관이 그것이다. 마르크스는 이런 낙관론에 동의하지 않았고, 대단히 비판적이었다. 비슷한 예로 레옹스 드 라베르뉴(Léonce de Lavergne)는 ‘노포크 윤작’이라 하여 양분이 충분히 되돌아감에도 휴경 없이 윤작이 가능한 경우를 설명했는데, 마르크스는 이것이 동화에 불과하다면서 비판했다. 마르크스가 집중적으로 본 것은 오히려 근대 농업이 집약적으로 변하면서 보인 수확 체감의 특수한 성질이었다. 이는 자본의 가치 증식 논리가 소재적 세계를 왜곡한 또 다른 현상이다.
4. 근대적인 농업 집약화의 부정적인 측면
마르크스가 리비히의 농화학 이론을 받아들이기 전에는 토양 고갈의 문제를 생산력이 충분히 발전하지 못하게 하는 걸림돌에서 찾았다. 예를 들어 1860년대 초 미국 남부 노예 노동을 기반으로 한 농업 체제 나타난 토양 고갈 문제에 대해, 마르크스는 그들이 조방농업을 고집했기 때문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리비히의 이론을 받아들이면서 대폭 수정되었다. 수확 체감의 법칙을 몰역사성에 근거한 추상으로 치부했던 것에서 자본주의 체제의 근대적 강탈 농업이 드러내는 소재적 측면의 모순으로 생각게 된 것이다. 이에 따라 마르크스는 농업 집약화의 방향이 토양의 제반 요소들을 되돌림 없이 소모시킴에 따라 ‘보충의 법칙’을 위반해 오히려 생산력을 떨어뜨린다는 견해에 동의하게 된다. 한편으로 그와 같은 자연적 물질대사의 교란은 도시 – 시골, 산업 – 농업의 이분화된 착취 관계를 유도해 사회적 물질대사의 교란을 야기한다. 결국 자본주의는 자연력과 노동력을 동시에 고갈시키는 것이다.
끊임없이 자연력을 쥐어 짬으로써 토지의 비옥도를 강탈하여 파괴하는 일은 산업의 생산력을 증가시키고, 그렇게 늘어난 생산력은 노동자에 대한 착취를 가속화하기 때문에 인간의 삶을 파괴한다. 착취는 이렇게 연쇄적인 것이다. 마르크스는 이렇기 때문에 근대적인 농업 집약화가 근시안적인 형태일 수 있다고 봤다. 아울러 착취의 사슬을 끊기 위해서는 토지를 소유물로 보는 관점에서 벗어나, 인간은 그곳을 단지 ‘점유’하고 있음을 알고 제대로 유지할 책임이 있다고 주장한다. 이는 사유재산 체제를 폐지하는 일이 단지 체제 변혁을 위한 것을 넘어서 인간의 지속 가능성, 자본의 물상화된 힘을 통제하고 그로부터 해방되는 과제와 맞닿아 있음을 알게 한다. 그렇기에 마르크스가 자연의 한계를 외면했다는 류의 주장은 그의 이론을 제대로 보지 못한 그릇된 것이다. 오히려 마르크스는 자연의 한계를 자체적으로 극복할 수 있다는 자본의 망상이 얼마나 파괴적이고 허황된지 보이고자 했다.